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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아일보> 1961년 11월 1일자 기사


경주문화재(慶州文化財)의 금석(今昔) (1)
석굴암(石窟庵)의 발견(發見), 무명(無名)의 한 우체부(郵遞夫)가
총독부(總督府)에서 48년전(年前)에 첫 보수(補修)
일인(日人)은 석상(石像) 등 도취(盜取)하고
<동아일보> 1961년 11월 1일자

'문화재' 이야기를 써 보아야겠다. 그것도 경주(慶州)의 것을. 1일부터는 혁명 후 처음 맞는 '문화재애호기간'이기도 하다. 경주--하면 누구나 안다. 찬란한 신라문화를 간직한 천년의 고도(古都)이라고. 외국관광객을 많이 불러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의례히 경주를 내세우고 경주를 자랑하려 한다. 그러나 우리는 경주를 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닐는지...... 기자는 지금 경주를 걸어보고 들어본다. 이곳저곳 길가나 논두렁에 아무렇게나 놓여진 돌들에도 어느 것 하나 의미 없는 것은 없다. 여기 이 기나긴 사연들. 기자는 때로 황홀하고 어느 때는 알지 못할 흥분을 느낀다. 물론 사계(斯界)의 전문가가 아닌 이유도 덧붙여서...... [박현태(朴鉉兌) 기자]

경주시내에서 첫날밤을 보내고 이튿날 아침 '석굴암'으로 떠났다. 경주역전에서 불국사 어귀까지 왕래하는 합승'택시'는 광광객들로 대혼잡--. 어른 아이 합쳐서 족히 20명 정도는 태우는 것이었다. 요즘의 서울 같으면 교통순경이 기절을 하고 넘어질 형편이었다.

불국사를 잠깐 둘러보고 관광'호텔' 앞을 지나 '석굴암'으로 가는 심한 비탈길로 들어섰다. 쉬엄쉬엄 약 1시간은 걸렸을까.

'석굴암'은 지금 빨가벗은 알몸뚱이다. 파란 잔디로 덮였던 봉토(封土)는 깨끗이 벗겨졌다 말많던 굴내의 누수(漏水)와 습기를 막기 위한 대대적인 공사가 진행중이다. 하얀 '씨멘트' 살갗을 가을햇빛 아래 드러내고 있는 '석굴암'의 모습은 무척 수줍다.

그 안은 원상대로 아직 있다. 상반신은 여자이고 그 아래는 남자를 본떴다고 전해지는 웅장한 석가여래본존좌상(釋迦如來本尊坐像)의 보일 듯 말 듯한 미소, '본존상' 바로 뒤에 있는 유난히도 화사한 '십일면관음보살상(十一面觀音菩薩像)'. 석굴암 왼편 첫 번째에 있는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의 허리를 왼편으로 약간 기대는 듯 연(蓮)잎 위에 서서 우아하고도 매끄러운 선...... 그러나 석굴암의 아름다움을 여기 서투른 솜씨로 옮기고자 하지 않는다. 흥미를 느낀 것은 다른데 있었다. '석굴암'이 어떻게 발견되었느냐 하는 ......

753c6eeaad6316800e2779bb10d56995.jpg지금도 모르는 사람이 없는 '석굴암'도 세상에 처음으로 소개된 것은 불과 52년밖에 되지 않는다. 잠깐 기록을 살펴보자. 4271년(즉 서기 1938년) 일정 '총독부'가 편 '불국사(佛國寺)와 석굴암(石窟庵)'에는 일정 연호 (명치, 明治) 42년 "경주인사에 의하여 처음으로 소개되었다"고 보인다. 또 바로 작년인 4293년(즉 서기 1960년) 9월 2일자 모신문기사에 의하면 흙속에 묻혔던 '석굴암'을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은 독일학자 '안드레 엑카르트' 박사라고 말하고 있다. 명치 42년과 엑카르트가 한국을 다녀갔다는 1909년과는 우연인지 몰라도 단기로는 4242년으로 연대가 일치된다. '경주인사'와 '독일인 엑카르트 박사' -- 어느 쪽이 맞으며 그 '경주인사'란 어떤 사람이었을까. 경주에서 나서 평생을 고적답사와 문화재 발굴에 바친 석당 최남주(石堂 崔南柱)씨의 이야기는 이러하였다.

'석굴암'을 처음으로 발견한 것은 '한일'합방 직전인 통감부(統監府) 시대의 어느 경주(慶州) 우체부였다. 그날도 경주에서 출발하여 불국사를 거쳐 토함산(土含山)의 동산령(東山嶺)을 넘어 동해안 지대로 우편배달을 가던 이 우체부는 범곡(凡谷)근처에서 능(陵) 같은 것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가까이 가보니 입구에는 문이 있고 천장은 무너져 있다.

들여다 보니 돌부처가 많이 흙속에 묻혀있다. 맡은 우편배달을 마치고 3, 4일 뒤에 우체국으로 돌아온 그는 이 사실을 일본인 우체국장 모리 바스케(森馬助)라는 사람에게 이야기했다. 일본말이 서투른 그는 "돌사람(이시노히토)이 하나 가득 차있다"고 설명을 했다 한다. 우체국장도 놀랐다. 그리하여 어느날 당시의 군수 양홍묵(梁弘默), 부(副) 군수인 일본인 키무라 시즈오(木村靜雄), 일인 고적애호가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 금융조합이사인 일인 고히라(小平), 일인사진사 타나카 카메쿠마(田中龜熊) 등과 함께 처음 답사를 하였다.

이 사실을 보고 받은 일인 통감 소네(曾根, 曾니의 잘못)가 직접 와 보았다. 곧 합방이 되었다. 총독 테라우치(寺內)가 와 보았다. 테라우치는 서울로 돌아가서 "이런 보물을 산중에 방치하는 것은 아까운 일이다. 이것을 전부 들어 서울로 운반하라"는 영을 내렸다. 과연 청부업자들이 내려왔으나 모두 테라우치를 '미친 사람'이라고 욕하고 돌아갔다. 이리하여 총독부는 합방한 지 3년만이며 지금부터 48년 전인 일정연호 '대정(大正)' 2년 10월에 '석굴암' 수리공사를 착공하게 된 것이다.

일인학자들도 솔직히 인정했듯이 보수된 석굴암이 원형과 많이 다르다는 것이 유감이었고 배수시설이 불충분하고 환기공이 없어 오늘날 다시 공사를 하게 된 것도 유감이지만 오늘날 그 보다 더 유감인 것이 있다. 처음 공사 전까지 있었던 감실(龕室)입구의 '유마거사석상(唯磨居士石像) 2기와 석굴 내의 '십일면관음보살상'(?) 앞에 놓였던 대리석으로 만든 정교한 오층석탑이 행방을 감춘 사실이 그것이다.

처음 답사에 참가했던 모로가(諸鹿)도 4262년(즉 서기 1929년) 경주 도청회의실에서 개최됐던 고적강의를 통하여 이것은 틀림없이 테라우치가 춤쳐갔다고 말하였다. 그때 강의'프린트'는 최남주(崔南柱)씨가 보관중 한일회담 문화재 반환청구의 자료로 제공되었다.

역사에 기록될 대발견을 하고도 이름 없이 사라진 우체부 --. 그는 영원히 빛나는 문화재를 남기고도 이름을 남기지 않는 신라공인(工人)들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었던가. (계속)

(정리 : 2006.5.6, 이순우, http://cafe.daum.net/distorted)

(*) 위의 증언 가운데 어떤 것은 액면 그대로 믿기 어려운 것도 있고, 또 다른 것은 초기 발견과정에 있어서 참고할 만한 사항들이 뒤섞여 있는 듯하다. 초기 탐방자 가운데 '키무라'가 등장하고 있으나 그의 자서전 <조선에서 늙어가며>에 보면 그가 경주로 부임한 것은 1910년 여름(6월)이다. 그리고 소네 통감이 석굴암에 올랐던 것은 1909년 봄이다. 따라서 그가 소네 통감보다 앞서 토함산에 등정하였다는 것은 뭔가 착오인 듯하다. 모로가와 고히라가 그곳에 올랐다면 어느 정도는 수긍할 수밖에 없는 내용인 듯하며, 사진사 타나카(경주 동양헌 주인)가 동행하였다는 부분도 웬만큼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실상 초기 석굴암 사진은 거의 전적으로 거의 작품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다. 경주우체국장 모리와 경주군수 양홍묵의 존재에 대해서는 따로 기록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