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eckcehop,the custom that wife works prostitution for house customer

Gaeckcehop 客妾(ケクチョプ、객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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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두어 기르는 가축'이었던 한국 여성사l인문/교양/기타

女人列傳 - 여성, 세상을 알다 
임종국 지음 / 아세아문화사 / 2006년 11월

nyonin.jpg부여에는 어떤 이유가 됐든 질투하는 아내를 숫제 죽여버리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때 시체를 산에 아무렇게나 버려 들짐승 밥으로 주기도 했다고. 그래도 항의 한마디 할 수 없는 친정, 아니 항의는커녕 시체라도 돌려받으려면 딸을 죽인 신랑에게 마소(가축)라도 바쳐야만 가능했단다. 

그런가 하면 고려 중엽에는 사대부들 사이에 남의 아내나 첩을 강탈하거나 훔쳐서 자기 것으로 점유해버리는 풍습이 있었다. '결혼도감', '과부처녀', '추고별감'이란 관제나 직제를 만들어 강제로 모집한 제 민족의 여자들을 원나라 등에 공녀로 바치기도 했던 이 파렴치한들 중에는 일부다처제를 주장하는 뻔뻔스런 인사까지 나올 정도였단다. 

'칠거지악'으로 여인들을 집안에 묶어 두고 열녀를 생산하였던 나라. 남아선호사상이 빚어낸 '씨받이'의 나라 조선은 어땠을까? 

조선에는 객첩(客妾)과 헌첩(獻妾)이 있었고 약탈혼과 보쌈이 있었다. 더욱 기가 막힌 사실은 임진왜란 직후 적들에게 짓밟힌 아내의 정조가 치욕스러워 이혼하기를 당당하게 요청하는 뻔뻔스런 남자들이 줄을 이었다나! 
객첩, 헌첩은 무엇인가. 객첩(客妾)은 나그네를 환대하는 뜻으로 자신의 아내나 첩, 혹은 딸을 제공하던 풍습이다. 헌첩(獻妾)은 자신의 출세나 영달을 위하여, 또는 자신의 허물을 무마하려고 제 아내나 딸을 바치는 풍습. 어느 정도였느냐면, 지방의 양반자제가 장원급제를 하고 귀향하는 길에 상납받는 여성들은 10여 명은 보통이었다나! 

물론 이렇게 상납받은 여인을 책임질 필요도 없었다. 두 번 다시 만날 일은 더더욱 없는 그저 1회용일 뿐. 그렇다면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낯선 남자에게 바쳐진 여인들은 어떻게 됐을까? 자신들의 무능함으로 지켜내지 못한 것을 반성하기는커녕 전쟁 중에 짓밟힌 아내나 딸에게 이혼과 자결을 강요하는 사회이고 보면 이후 여인들의 삶은 뻔하다.

책에서 만난 어이없는 풍습중 하나.

남해안 낙도에서는 아내가 남편에게 외도를 권하는 풍습이 제법 성행하고 있었다. '물질'이나 '길쌈'으로 돈이 모이면 통영 혹은 여수나 부산 같은 곳으로 남편을 원정케 해서 주색으로 호색으로 호강시켰다는 말이다. 그런데 기절할 일은 남편이 되도록 먼 곳에서 오래 놀다 와야만 그녀들의 체면이 섰다던가? 이 자랑 하나를 위해 그녀들은 밤낮없는 노동으로 손발이 거칠게 되었다. 이렇게 거꾸로 뒤집힌 윤리의식은 아내들이 인격도 없는 가축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였다. (책 230P '여성, 가두어 기르는 가축') 

참으로 웃기는 일인데 엄연하게 있었던 풍습이요, 심지어는 남편의 폐병에는 아내의 심장이나 간이 좋다는 미신 때문에 자살을 강요당한 여인들도 비일비재했단다. 그야말로 당시 여성들은 '가두어 기르는 가축 같은 존재', '남자의 소유물, 즉 동산(動産)의 일종으로 취급될 뿐'이었다. 물물교환 되듯 팔리는 여인들도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책을 통하여 만나는 한국여성인권유린의 실례는 끝도 없다. 이런 사례들은 가족들의 생계를 위하여 쌀 한 말, 혹은 보리 한 가마에 팔려가기도 했던 딸들의 이야기는 차라리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마저 하게 할 만큼 어이없고 충격적이었다.

그야말로 '칠거지악'과 같은 관습으로 묶어 집에서 기르는 가축같은 존재, 남편과 아버지의 일종의 동산(動産)이었던 한국 여성들인 것이다. 이런 오랜 결과로 나타난 여성들의 자기찾기,1920년대 억압받고 유린당한 여성들의 목숨을 건 선택을 보자. 

...자유와 평등, 인격에 눈을 뜬 부작용이겠지만 이혼은 1920년대 말에서 근래에까지도 사회에서 하나의 변괴로 인식되고 있다. 이 때문에 이혼을 못하는 여자들은 또 하나의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만다. 그것은 남편 음식에 양잿물을 섞는 독살사건이다. 1930년대 서대문에 수감된 살인범은 남자 53명에 대해서 여자 47명으로 여자가 약 90퍼센트인데, 그중 66퍼센트가 본부(本夫) 살해범이었다. 

세계적으로도 남녀 살인범의 비율을 보면 남자 100명에 대해서 여자가 4명이다. 이를 보면 한국에 여자 살인범이 많았음을 알 수 있는데, 더욱이 본부 독살은 1920년대 한국 특유의 범죄였다. 가히 한국의 범죄 특산물이라고 할 정도로 본부 독살이 많았다. (본문에서) 

부끄럽지만 아직 100년도 채 되지 않은, 일제강점기였던 당시, 하루가 멀다 않고 신문에 올라오는 기사들은 이혼과 이와 같은 본부 살인. 저자는 당시의 신문기사와 사례 등을 자세히 소개하면서 구한말에서 1930년대까지 이 땅의 여성들이 어떤 위치에서 어떻게 살아냈는지를 속도감 있게 들려준다. 

<여인열전-여성, 세상을 열다>로 만나는 '한국 여성 가혹사'는 그야말로 기절초풍할 정도였다. 부모들의 사사로운 잇속으로 태어난 지 100일도 안 되어 과부가 되어 평생 수절해야만 했던 지난날 한국 여인들의 한을 내 어찌 이해하랴. 

70년 전 남편을 독살할 수밖에 없었던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여성의 평등과 인권(성)을 주장해왔지만 황혼이혼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여성들이 여전한 현실이고, 남편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남편을 살인하는 일까지 최근의 일인지라 같은 여자로서 책을 읽는 동안의 비통함과 무거운 마음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이 책에는 가부장제의 굴레와 일제의 가혹한 통치 아래 자신의 삶을 찾으려던 신여성들의 도전과 좌절(1부), 근대사회로 진입하면서 매매춘이 본격화하는 가운데 이에 맞춰 변화할 수밖에 없었던 조선 기생들과 새로 등장하는 일본 게이샤들의 요지경 세태(2부), 여염집 부녀들의 애환과 애정 풍속 등등, 다채로운 여성사(3, 4부) 관련 글들이 풍성하게 실려 있다. 

윤심덕, 김일엽, 박경원, 나혜석, 배정자 등 비교적 많이 알려진, 한국 근대 신여성들의 격정적인 일대기를 시대 흐름 따라 읽는 맛도 좋았다. 이들뿐이랴. 질곡의 구한말 천주교에 대한 믿음으로 순교의 꽃을 피운 김마리아나 또 다른 여인들 이야기나 무명의 수많은 여인들의 다양한 일화도 재미있다. 성종(조선)의 처녀 재판이나 구한말 기녀들의 이야기도 파란만장하고 재미있는, 한국여성사였다. 

<여인열전-여성, 세상을 열다>는 <임종국선집> 중 7권. 친일문제연구에 전념을 다하던 중 폐기종으로 타계한(1989년) 임종국 선생을 존경하고 따랐던 사람들이 고인의 뜻을 기리고자 고인이 여러 매체에 기고했던 글들을 정리한 것이다. 

3, 4권에 해당하는 <한국인의 생활과 풍속>(1995년 상, 하)이 나온 지 꼭 10년만이다. 앞서 5, 6권 <여심이 회오리치면>(상, 하)가 2006년 1월에 출간되었다. 여러모로 의미와 가치가 남다른 책이다. 

"임종국선생의 원고들을 선집으로 편찬하면서 새삼 선생의 시대를 앞서간 문제의식과 연구 성과, 그리고 민족에 대한 깊은 사랑을 확인할 수 있었다. 친일문제에 관한 선생의 연구 업적은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이 분야 연구에 독보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친일청산을 향한 선생의 외로운 개척자의 길은 이제 역사의 큰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어디 그뿐이랴! 2,30년 전만 해도 아무도 돌아보지 않던 사회사나 여성사에 대해서도 선생은 대중적 서술 형태를 빌어 기초를 닦아 놓았다. - 임종국선집을 출간하면서, 임헌영(민족문제연구소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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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두어 기르는 가축'이었던 한국 여성사 - 임종국| 자유 게시판
광복군|조회 67|추천 0|2008.02.17. 02:19
'가두어 기르는 가축'이었던 한국 여성사 

부여에는 어떤 이유가 됐든 질투하는 아내를 숫제 죽여버리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때 시체를 산에 아무렇게나 버려 들짐승 밥으로 주기도 했다고. 그래도 항의 한마디 할 수 없는 친정, 아니 항의는커녕 시체라도 돌려 받으려면, 딸을 죽인 신랑에게 마소(가축)라도 바쳐야만 가능했단다.

그런가 하면 고려 중엽에는 사대부들 사이에 남의 아내나 첩을 강탈하거나 훔쳐서 자기 것으로 점유해버리는 풍습이 있었다. '결혼도감', '과부처녀', '추고별감'이란 관제나 직제를 만들어 강제로 모집한 제 민족의 여자들을 원나라 등에 공녀로 바치기도 했던 이 파렴치한들 중에는 일부다처제를 주장하는 뻔뻔스런 인사까지 나올 정도였단다.

'칠거지악'으로 여인들을 집안에 묶어 두고 열녀를 생산하였던 나라. 남아선호사상이 빚어낸 '씨받이'의 나라 조선은 어땠을까?

조선에는 객첩(客妾)과 헌첩(獻妾)이 있었고 약탈혼과 보쌈이 있었다. 더욱 기가 막힌 사실은 임진왜란 직후, 적들에게 짓밟힌 아내의 정조가 치욕스러워 이혼하기를 당당하게 요청하는 뻔뻔스런 남자들이 줄을 이었다나!

객첩, 헌첩은 무엇인가. 객첩(客妾)은 나그네를 환대하는 뜻으로 자신의 아내나 첩, 혹은 딸을 제공하던 풍습이다. 헌첩(獻妾)은 자신의 출세나 영달을 위하여, 또는 자신의 허물을 무마하려고 제 아내나 딸을 바치는 풍습. 어느 정도였느냐면, 지방의 양반자제가 장원급제를 하고 귀향하는 길에 상납받는 여성들은 10여 명은 보통이었다나!

물론 이렇게 상납받은 여인을 책임질 필요도 없었다. 두 번 다시 만날 일은 더더욱 없는 그저 1회용일 뿐. 그렇다면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낯선 남자에게 바쳐진 여인들은 어떻게 됐을까? 자신들의 무능함으로 지켜내지 못한 것을 반성하기는커녕 전쟁 중에 짓밟힌 아내나 딸에게 이혼과 자결을 강요하는 사회이고 보면 이후 여인들의 삶은 뻔하다. 


女人列傳 - 여성, 세상을 알다 
임종국 지음 / 아세아문화사 / 2006년 11월


책에서 만난 어이없는 풍습중 하나.

남해안 낙도에서는 아내가 남편에게 외도를 권하는 풍습이 제법 성행하고 있었다. '물질'이나 '길쌈'으로 돈이 모이면 통영 혹은 여수나 부산 같은 곳으로 남편을 원정케 해서 주색으로 호색으로 호강시켰다는 말이다. 그런데 기절할 일은 남편이 되도록 먼 곳에서 오래 놀다 와야만 그녀들의 체면이 섰다던가? 이 자랑 하나를 위해 그녀들은 밤낮없는 노동으로 손발이 거칠게 되었다. 이렇게 거꾸로 뒤집힌 윤리의식은 아내들이 인격도 없는 가축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였다. (책 230P '여성, 가두어 기르는 가축')

참으로 웃기는 일인데 엄연하게 있었던 풍습이요, 심지어는 남편의 폐병에는 아내의 심장이나 간이 좋다는 미신 때문에 자살을 강요당한 여인들도 비일비재했단다. 그야말로 당시 여성들은 '가두어 기르는 가축 같은 존재', '남자의 소유물, 즉 동산(動産)의 일종으로 취급될 뿐'이었다. 물물교환 되듯 팔리는 여인들도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책을 통하여 만나는 한국여성인권유린의 실례는 끝도 없다. 이런 사례들은 가족들의 생계를 위하여 쌀 한 말, 혹은 보리 한 가마에 팔려가기도 했던 딸들의 이야기는 차라리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마저 하게 할 만큼 어이없고 충격적이었다.

그야말로 '칠거지악'과 같은 관습으로 묶어 집에서 기르는 가축같은 존재, 남편과 아버지의 일종의 동산(動産)이었던 한국 여성들인 것이다. 이런 오랜 결과로 나타난 여성들의 자기찾기,1920년대 억압받고 유린당한 여성들의 목숨을 건 선택을 보자.

...자유와 평등, 인격에 눈을 뜬 부작용이겠지만 이혼은 1920년대 말에서 근래에까지도 사회에서 하나의 변괴로 인식되고 있다. 이 때문에 이혼을 못하는 여자들은 또 하나의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만다. 그것은 남편 음식에 양잿물을 섞는 독살사건이다. 1930년대 서대문에 수감된 살인범은 남자 53명에 대해서 여자 47명으로 여자가 약 90퍼센트인데, 그중 66퍼센트가 본부(本夫) 살해범이었다.

세계적으로도 남녀 살인범의 비율을 보면 남자 100명에 대해서 여자가 4명이다. 이를 보면 한국에 여자 살인범이 많았음을 알 수 있는데, 더욱이 본부 독살은 1920년대 한국 특유의 범죄였다. 가히 한국의 범죄 특산물이라고 할 정도로 본부 독살이 많았다. (본문에서)

부끄럽지만 아직 100년도 채 되지 않은, 일제강점기였던 당시, 하루가 멀다 않고 신문에 올라오는 기사들은 이혼과 이와 같은 본부 살인. 저자는 당시의 신문기사와 사례 등을 자세히 소개하면서 구한말에서 1930년대까지 이 땅의 여성들이 어떤 위치에서 어떻게 살아냈는지를 속도감 있게 들려준다.

<여인열전-여성, 세상을 열다>로 만나는 '한국 여성 가혹사'는 그야말로 기절초풍할 정도였다. 부모들의 사사로운 잇속으로 태어난 지 100일도 안 되어 과부가 되어 평생 수절해야만 했던 지난날 한국 여인들의 한을 내 어찌 이해하랴.

70년 전 남편을 독살할 수밖에 없었던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여성의 평등과 인권(성)을 주장해왔지만 황혼이혼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여성들이 여전한 현실이고, 남편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남편을 살인하는 일까지 최근의 일인지라 같은 여자로서 책을 읽는 동안의 비통함과 무거운 마음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이 책에는 가부장제의 굴레와 일제의 가혹한 통치 아래 자신의 삶을 찾으려던 신여성들의 도전과 좌절(1부), 근대사회로 진입하면서 매매춘이 본격화하는 가운데 이에 맞춰 변화할 수밖에 없었던 조선 기생들과 새로 등장하는 일본 게이샤들의 요지경 세태(2부), 여염집 부녀들의 애환과 애정 풍속 등등, 다채로운 여성사(3, 4부) 관련 글들이 풍성하게 실려 있다.

윤심덕, 김일엽, 박경원, 나혜석, 배정자 등 비교적 많이 알려진, 한국 근대 신여성들의 격정적인 일대기를 시대 흐름 따라 읽는 맛도 좋았다. 이들뿐이랴. 질곡의 구한말 천주교에 대한 믿음으로 순교의 꽃을 피운 김마리아나 또 다른 여인들 이야기나 무명의 수많은 여인들의 다양한 일화도 재미있다. 성종(조선)의 처녀 재판이나 구한말 기녀들의 이야기도 파란만장하고 재미있는, 한국여성사였다.

<여인열전-여성, 세상을 열다>는 <임종국선집> 중 7권. 친일문제연구에 전념을 다하던 중 폐기종으로 타계한(1989년) 임종국 선생을 존경하고 따랐던 사람들이 고인의 뜻을 기리고자 고인이 여러 매체에 기고했던 글들을 정리한 것이다.

3, 4권에 해당하는 <한국인의 생활과 풍속>(1995년 상, 하)이 나온 지 꼭 10년만이다. 앞서 5, 6권 <여심이 회오리치면>(상, 하)가 2006년 1월에 출간되었다. 여러모로 의미와 가치가 남다른 책이다.

"임종국선생의 원고들을 선집으로 편찬하면서 새삼 선생의 시대를 앞서간 문제의식과 연구 성과, 그리고 민족에 대한 깊은 사랑을 확인할 수 있었다. 친일문제에 관한 선생의 연구 업적은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이 분야 연구에 독보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친일청산을 향한 선생의 외로운 개척자의 길은 이제 역사의 큰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어디 그뿐이랴! 2,30년 전만 해도 아무도 돌아보지 않던 사회사나 여성사에 대해서도 선생은 대중적 서술 형태를 빌어 기초를 닦아 놓았다. - 임종국 선집을 출간하면서 - 임헌영(민족문제연구소소장)


보이지 않는 벽

인습이라는 벽은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었으나 두꺼운 것이었고, 손으로 만져지는 것은 아니었으나 무엇으로도 깨드리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조선 사람들은 그 두꺼운 인습의 벽 뒤로 깊이깊이 숨어 들어가 있었습니다. 

어떠한 인습이 조선을 뒤덮고 있었습니까? 우선 여자들을 보기가 어려웠습니다. 양반집 부녀자들은 가마는 타고 다녔고, 형편이 그렇지 못한 이들은 장옷이라는 두루마기를 머리부터 뒤집어 쓰고 눈만 내놓고 다녀서 얼굴을 볼 기회가 좀처럼 없었습니다. 여자들은 집안에서나 밖에서나 완전히 숨겨진 존재들이었습니다. 사회에서 사람취급을 못 받았고 미물인 버러지에게조차 있는 이름을 가진 이가 없었습니다. 고대 중엽에는 사대부들 사이에 아내나 첩을 강탈하거나 훔치는 습속도 있었습니다. 흉년이 들면 딸을 팔아먹는 농민들이 허다했고, 노름하다가 빚을 진 남편이 아내를 팔기도 했습니다. 과거 급제한 선비에게 벼슬아치나 토호들은 자기 허물을 감추거나 열 달을 기대하며 뇌물처럼 자신들의 딸이나 첩을 바쳐 시침 들게 하는 객첩이라는 풍습도 있었습니다. 

병원에는 온갖 종류의 환자들로 넘쳐 났는데 그들은 약이라는 것을 신묘한 것으로 믿어버리거나 시들하게 알아 복용하지 않기도 했습니다. 국민 전체가 회충 환자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조선 사람들은 뱃속에 회충이 아주 없으면 사람이 죽는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여자들이 병원에 나오는 경우는 ‘에라 죽을 수밖에 없는 일이라면 한번 병원에나 가보고 죽자’는 심정으로 마지막 길 삼아 병원에 찾아오는 것이었습니다. 

한번은 헤론, 알렌, 언더우드가 ‘배꼽 밑에 화상의 흉터가 있는 몇몇의 여자환자’를 놓고 무슨 특수한 병이 아닐까? 의논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온제종자법(溫劑種子法)이라 하여 아들을 얻기 위해 뜨겁게 볶은 소금을 배꼽에 담고 그 위에 쑥 찜질을 2백 번 내지 3백 번을 하는 풍속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조선의 여자는 오직 아들을 낳기 위한 도구였습니다. 이 때문에 아들 못 낳는 아내를 대신하여 아들을 낳아주는 직업적인 여성 ’씨받이’들이 있었습니다. 이뿐 아니라, 남편 쪽에 결함이 있을 경우 ‘씨내리’라 하여 아내에게 외간남자를 강제로 안겨주는 악습도 있었습니다. 이런 일들을 극비에 부치기 위해 일이 끝난 후 동침한 외간남자에게 후한 대가를 지불하여 보내놓고 몰래 뒤쫓아가 살해하여 암매장을 한다든가, 그런 방법으로 아들을 낳아 놓은 양반집 부인이 목을 메어 자살하고 마는 일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뱃속에 있을 때에 정혼을 했다가 남자아이가 태어난 뒤 죽거나 하면 여자아이 편이 미망인이 되었고, 그래서 일곱 살짜리 미망인도 생기고 열 살짜리 홀아비도 생겼습니다. 조선 땅을 묶어 놓고 있는 어둠 속에서 온갖 기괴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조선 사람들은 선교사들을 사람으로 여기질 않았습니다. 처음 보는 짐승 보듯 하고 때로는 귀신이라고 소리치며 달아났습니다. 

언더우드(Underwood, Horace Grant, 1859.7.19~1916)의 기도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청청하고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은 옮겨와 앉아 있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질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사람 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모르고 묶여 있는 것이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 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질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질 않습니다. 장옷을 쓰고 다니거나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찌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하게 될 일이 어떤 것인지 그 일이 어떻게 나타나게 될는지 조금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에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을 날이 있을 것을 믿을 뿐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저의 믿음이 앞날의 조선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귀신 양귀자(洋鬼子)라고 손가락질을 받고 있사오나, 저들이 우리의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습니다. 지금은 예배를 드릴 예배당도 없고 가르칠 장소,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박대만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선교사들은 인습의 장벽 안에 갇혀있는 조선 사람들을 오래 참고 기다리는 인내의 사랑으로 섬겼습니다. 병원을 개설하였고, 학교를 세웠습니다. 아펜젤러(Appenzeller, Henry Gerhard, 1858.2.6~1902) 목사를 통해 배재학당(배재대학교)이 스크랜톤(Mrs. Mary Fitch Scranton, 1832­~1929) 여사를 통해 이화학당(이화여대) 언더우드 목사를 통해 경신학교 대학부(연세대학교)가 설립되었습니다. 

조선인들을 배움의 길로 인도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조선 여자들을 불러모으는 것은 불가능하였습니다. 그들은 “뭘 배워요? 아,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무엇 한가하게 배우고 있어욧?” 라고 말하였습니다. 한편에서는 여자를 가르친다는 것 자체를 부정하였습니다. “여자를 가르쳐서 뭐하나? 소처럼 일하고 아이나 뽑으면 됐지, 기집한테 뭘 가르친다는 게여? 그걸 뭣에다 써먹어?” 그러나 선교사들은 조선 땅의 젊은이들이 배울 수 있는 길을 열기 위하여 여러모로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병원개설과 학교설립의 궁극적인 목적은 전도에 있었습니다. 

스크랜톤 여사는 말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얻는다 하였으니 조선 사람들의 귀가 열리게 해 주십사고 기도해 가며 계속 두드려야겠지요. 그 귀에다가 믿음을 심어주고 그렇게 믿음이 심어지면 그 마음에서 사랑의 나무가 움트고 그 사랑의 나무에서 이 민족을 변화시킬 열매가 열리리라고 나는 믿습니다.” 스크랜톤 여사는 조선의 여성들이 인간의 권리를 찾는 길을 열어주고자 힘썼습니다.

선교사들은 조선인들의 영혼을 사랑하였고 조선이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을 통하여 보다 훌륭한 나라가 되는 길을 가르치고자 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모든 수고를 감당하였습니다. 언더우드 목사는 정혼한 약혼녀와 파혼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의 기도와 믿음과 비전을 축복하셔서 인습의 장벽 안에 갇혀 있던 조선이 복음으로 변화되어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가 되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120여년전과 오늘의 모습을 비교할 때 하나님께서 이땅 가운데 베푸신 놀라운 은혜에 다만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조선을 뒤덮고 있던 두꺼운 인습의 벽을 허무시고 변화시키신 하나님의 역사에 감사합니다. 

복음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그 존재가치가 여겨지지 않던 조선시대의 여자의 위치가 오늘날 여성장관과 여당대표를 비롯한 각계 각층에서 활약하는 여성의 모습으로 놀랍게 변화된 것을 보게 됩니다. 또한 선교사님들의 삶과 믿음을 통해서 많은 은혜를 받습니다. 

그들의 분명한 복음 신앙을 배웁니다. 그들은 오직 복음만이 조선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비록 당시는 인습의 장벽에 막힌 현실 앞에 그 끝을 기대할 수 없었지만 결국 역사하실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선교사님들의 조선인들을 향한 사랑을 배웁니다. 그들은 양귀자라 놀림받고 거부당하였지만 조선인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이해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먼저 조선인들의 신뢰를 얻고자 하였습니다. 조선인들은 이타적인 사랑에 대한 개념이 없는 듯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무 조건 없이 조선인들을 치료하고 교육하고자 하는 선교사들을 쉽게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꿍꿍이 속이 있지 않는가 늘 의심하며 경계했습니다. 그들은 먼저 조선인들의 신뢰를 얻어야 했습니다. 그들이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을 펼친 것도 궁극적으로는 신뢰를 얻어 복음을 전하고자 함 이었습니다. 그들은 어찌보면 손쉽게 복음만을 전하고자 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먼저 여러 섬김의 수고와 희생을 감당했습니다. 스크랜톤 부인은 말했습니다. “오직 기도뿐. 우리들의 헌신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꽃피게 해주십사고 기도하며 실제로 조선의 형제들을 내 목숨같이 사랑하는 길만이 조선 사람들의 마음문이 열리게 하는 방법일 것.” 이기적인 신세대 양들이 쉽게 마음을 열지 않고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그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여러 가지로 섬기는 수고를 감당해야겠습니다. 

그들의 분명한 비전과 하나님께 대한 기대감을 통해 은혜를 받습니다. 그들은 좀처럼 희망을 찾아볼 수 없는 조선 땅 가운데 역사하실 하나님께 대한 분명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스크랜톤 여사는 복음을 통해 조선 땅의 여자들이 인간의 권리를 되찾게 될 비전을 보며 교육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녀는 감리회 여선교부 최초의 여선교사였습니다. 아직 학생하나 없는 상황 가운데서도 좌절하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학교 부지를 구하고 건물을 세우는 역사를 섬겼습니다. 그 건물 속에서 어느 나라 여성 보다도 당당할 딸들이 늠름하게 걸어나올 날을 믿고 기대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믿음으로 묵묵하게 최선을 다하여 감당하였고 무엇보다 결국 역사하실 하나님께 대한 기대로 충만하였습니다. 결국 그러한 그대와 믿음대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셨음을 보게 됩니다. 제가 지파를 섬기며 신재문 형제님을 말씀으로 섬길 때 역사하실 하나님께 대한 확신과 기대를 가지고 섬겨야 함을 배웁니다.  하나님께 대한 기대감과 비전이 진정한 믿음이며 하나님은 그대로 역사하시는 분이심을 배웁니다. 제가 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대합니다. 신재문 형제가 복음으로 변화되어 그 인생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인생으로 활짝 꽃피우며 드려질 것을 믿고 기대합니다. 하나님께서 조이 지파 동역자님들 각 분을 축복하셔서 하나님의 양 무리들을 살리는 역사에 귀하에 쓰시며 그 인생을 통해서 영광을 나타내실 것을 믿고 기대합니다. 지파가 2008년에 한부를 개척할 만한 성령의 그릇으로 빚어질 것을 믿고 기대합니다. 깨어질 것 같지 않던 조선 사람들의 두터운 인습의 벽이 오래 참고 인내하는 사랑과 끊임없는 기도와 믿음으로 허물어지고 변할 것 같지 않던 조선이 제사장 나라로 변화되었습니다. 

복음의 능력 앞에, 그리스도의 사랑 앞에 허물어지지 않을 벽이 없습니다. 이 복음의 능력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역사 하심에 대한 믿음과 기대로 캠퍼스 복음역사를 섬기길 기도합니다.

갈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조선시대 첩에 대하여

조선시대에는 첩을 별가(別家), 소실(小室) , 소가(小家) 또는 측실(側室)로 불리었으며, 축첩이 공인되었다. 첩의 지위는 처에 준하는 지위가 인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재산상속권도 인정되었지만, 첩의 자녀는 적자녀(嫡子女)와는 달리 첩자녀 또는 서자(庶子)라 불러 차별대우를 받았다. 또한, 일정 관직 이상에 오를 수도 없었을 만큼 제한이 있었고, 상속에 있어서 감액되었다. 다만 적자가 없을 때에는 서자에게도 조상봉사(祖上奉祀) 권한이 인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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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첩: 남편의 권세를 믿고 다복해진 첩
환첩: 환관(내시)의 아내와 내통하면 환관을 움직여 등과나 벼슬을 할 수 있기 때문에 환첩을 얻었다" 하였음
객첩: 주로 과거에 급제한 선비들은 금의환향하는 길에 고을 벼슬아치나 부잣집에서 환대하며 집주인의 딸을 하나 골라 손님방에 넣어주는 첩
습첩: 결혼 후 소박맞은 여자가 친정에도 못 갈 때 성황당 밖에 나가 최초로 만나게 되는 남자에게 자신을 넘겨주는 것(인신도박)
헌첩: 관가에 중사가 걸렸거나 죄를 지어 형을 받았을 때 그 청탁이나 형을 면하는 조건으로 관원에게 딸을 첩으로 바치는 것

*법률제도 안 축접제도: '경국대전' 예전봉사조(禮典奉祀條)). 한말의 '형법대전(刑法大典)'은 축첩제도를 공인하였다. 처는 2등, 첩은 4등의 지위를 인정하였으며(64조 7호), 국권피탈 후 일제강점기 초에도 첩은 공인되어 호적에 첩과 서자(庶子)가 기재되었고, 재산상속권도 인정되었음

1915년에 이르러서야 총독부 통첩(24호)으로 첩의 호적 입적이 금지됨으로써 첩은 공인되지 않게 되었으며 1943년에 고등법원에서 축첩이 재판상의 이혼원인이 된다고 판시하였다. 8 ·15광복 후, 제헌헌법은 남녀평등의 원칙(8조)과 특히 혼인의 남녀동권 및 순결(20조)을 규정함으로써 축첩은 금지되었으며, 형법은 간통죄에서 남자도 처벌하는 쌍벌주의를 취하였으며, 공무원법상으로는 축첩이 징계사유가 되어 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79516 

'가두어 기르는 가축'이었던 여성, 그들의 이야기
[서평] 임종국선집 7권 <여인열전-여성, 세상을 열다>
06.12.16 11:33l최종 업데이트 06.12.25 12:03l김현자(ananh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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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인열전-여성,세상을 열다>
ⓒ 아세아문화사 <여인열전-여성, 세상을 열다>를 통하여 만난 한국여성들의 인권유린은 뜻밖이었고 충격이었다. 난 왜 이제껏 여성을 억압하는 관습으로 '칠거지악'이나 '씨받이' 정도만 생각하고 있었을까?

부여에는 어떤 이유가 됐든 질투하는 아내를 숫제 죽여버리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때 시체를 산에 아무렇게나 버려 들짐승 밥으로 주기도 했다고. 그래도 항의 한마디 할 수 없는 친정, 아니 항의는커녕 시체라도 돌려받으려면 딸을 죽인 신랑에게 마소(가축)라도 바쳐야만 가능했단다.

그런가 하면 고려 중엽에는 사대부들 사이에 남의 아내나 첩을 강탈하거나 훔쳐서 자기 것으로 점유해버리는 풍습이 있었다. '결혼도감', '과부처녀', '추고별감'이란 관제나 직제를 만들어 강제로 모집한 제 민족의 여자들을 원나라 등에 공녀로 바치기도 했던 이 파렴치한들 중에는 일부다처제를 주장하는 뻔뻔스런 인사까지 나올 정도였단다.

가두어 기르는 가축, 일종의 동산(動産)이었던 한국 여성들

'칠거지악'으로 여인들을 집안에 묶어 두고 열녀를 생산하였던 나라. 남아선호사상이 빚어낸 '씨받이'의 나라 조선은 어땠을까?

조선에는 객첩(客妾)과 헌첩(獻妾)이 있었고 약탈혼과 보쌈이 있었다. 더욱 기가 막힌 사실은 임진왜란 직후 적들에게 짓밟힌 아내의 정조가 치욕스러워 이혼하기를 당당하게 요청하는 뻔뻔스런 남자들이 줄을 이었다나!

객첩, 헌첩은 무엇인가. 객첩(客妾)은 나그네를 환대하는 뜻으로 자신의 아내나 첩, 혹은 딸을 제공하던 풍습이다. 헌첩(獻妾)은 자신의 출세나 영달을 위하여, 또는 자신의 허물을 무마하려고 제 아내나 딸을 바치는 풍습. 어느 정도였느냐면, 지방의 양반자제가 장원급제를 하고 귀향하는 길에 상납받는 여성들은 10여 명은 보통이었다나!

물론 이렇게 상납받은 여인을 책임질 필요도 없었다. 두 번 다시 만날 일은 더더욱 없는 그저 1회용일 뿐. 그렇다면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낯선 남자에게 바쳐진 여인들은 어떻게 됐을까? 자신들의 무능함으로 지켜내지 못한 것을 반성하기는커녕 전쟁 중에 짓밟힌 아내나 딸에게 이혼과 자결을 강요하는 사회이고 보면 이후 여인들의 삶은 뻔하다.

남해안 낙도에서는 아내가 남편에게 외도를 권하는 풍습이 제법 성행하고 있었다. '물질'이나 '길쌈'으로 돈이 모이면 통영 혹은 여수나 부산 같은 곳으로 남편을 원정케 해서 주색으로 호색으로 호강시켰다는 말이다. 그런데 기절할 일은 남편이 되도록 먼 곳에서 오래 놀다 와야만 그녀들의 체면이 섰다던가? 이 자랑 하나를 위해 그녀들은 밤낮없는 노동으로 손발이 거칠게 되었다. 이렇게 거꾸로 뒤집힌 윤리의식은 아내들이 인격도 없는 가축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였다. (책 230P '여성, 가두어 기르는 가축')

참으로 웃기는 일인데 엄연하게 있었던 풍습이요, 심지어는 남편의 폐병에는 아내의 심장이나 간이 좋다는 미신 때문에 자살을 강요당한 여인들도 비일비재했단다. 그야말로 당시 여성들은 '가두어 기르는 가축 같은 존재', '남자의 소유물, 즉 동산(動産)의 일종으로 취급될 뿐'이었다. 물물교환 되듯 팔리는 여인들도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책을 통하여 만나는 한국여성인권유린의 실례는 끝도 없다. 이런 사례들은 가족들의 생계를 위하여 쌀 한 말, 혹은 보리 한 가마에 팔려가기도 했던 딸들의 이야기는 차라리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마저 하게 할 만큼 어이없고 충격적이었다.

1920년대 억압받고 유린당한 여성들의 목숨을 건 선택을 보자.

...자유와 평등, 인격에 눈을 뜬 부작용이겠지만 이혼은 1920년대 말에서 근래에까지도 사회에서 하나의 변괴로 인식되고 있다. 이 때문에 이혼을 못하는 여자들은 또 하나의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만다. 그것은 남편 음식에 양잿물을 섞는 독살사건이다. 1930년대 서대문에 수감된 살인범은 남자 53명에 대해서 여자 47명으로 여자가 약 90퍼센트인데, 그중 66퍼센트가 본부(本夫) 살해범이었다.

세계적으로도 남녀 살인범의 비율을 보면 남자 100명에 대해서 여자가 4명이다. 이를 보면 한국에 여자 살인범이 많았음을 알 수 있는데, 더욱이 본부 독살은 1920년대 한국 특유의 범죄였다. 가히 한국의 범죄 특산물이라고 할 정도로 본부 독살이 많았다. (본문에서)

부끄럽지만 아직 100년도 채 되지 않은, 일제강점기였던 당시, 하루가 멀다 않고 신문에 올라오는 기사들은 이혼과 이와 같은 본부 살인. 저자는 당시의 신문기사와 사례 등을 자세히 소개하면서 구한말에서 1930년대까지 이 땅의 여성들이 어떤 위치에서 어떻게 살아냈는지를 속도감 있게 들려준다.



친일문제 연구에 평생을 바친 임종국 선생이 남긴 한국 여성사

<여인열전-여성, 세상을 열다>로 만나는 '한국 여성 가혹사'는 그야말로 기절초풍할 정도였다. 부모들의 사사로운 잇속으로 태어난 지 100일도 안 되어 과부가 되어 평생 수절해야만 했던 지난날 한국 여인들의 한을 내 어찌 이해하랴.

70년 전 남편을 독살할 수밖에 없었던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여성의 평등과 인권(성)을 주장해왔지만 황혼이혼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여성들이 여전한 현실이고, 남편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남편을 살인하는 일까지 최근의 일인지라 같은 여자로서 책을 읽는 동안의 비통함과 무거운 마음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이 책에는 가부장제의 굴레와 일제의 가혹한 통치 아래 자신의 삶을 찾으려던 신여성들의 도전과 좌절(1부), 근대사회로 진입하면서 매매춘이 본격화하는 가운데 이에 맞춰 변화할 수밖에 없었던 조선 기생들과 새로 등장하는 일본 게이샤들의 요지경 세태(2부), 여염집 부녀들의 애환과 애정 풍속 등등, 다채로운 여성사(3, 4부) 관련 글들이 풍성하게 실려 있다.

윤심덕, 김일엽, 박경원, 나혜석, 배정자 등 비교적 많이 알려진, 한국 근대 신여성들의 격정적인 일대기를 시대 흐름 따라 읽는 맛도 좋았다. 이들뿐이랴. 질곡의 구한말 천주교에 대한 믿음으로 순교의 꽃을 피운 김마리아나 또 다른 여인들 이야기나 무명의 수많은 여인들의 다양한 일화도 재미있다. 성종(조선)의 처녀 재판이나 구한말 기녀들의 이야기도 파란만장하고 재미있는, 한국여성사였다.

<여인열전-여성, 세상을 열다>는 <임종국선집> 중 7권. 친일문제연구에 전념을 다하던 중 폐기종으로 타계한(1989년) 임종국 선생을 존경하고 따랐던 사람들이 고인의 뜻을 기리고자 고인이 여러 매체에 기고했던 글들을 정리한 것이다.

3, 4권에 해당하는 <한국인의 생활과 풍속>(1995년 상, 하)이 나온 지 꼭 10년만이다. 앞서 5, 6권 <여심이 회오리치면>(상, 하)가 2006년 1월에 출간되었다. 여러모로 의미와 가치가 남다른 책이다.

"임종국선생의 원고들을 선집으로 편찬하면서 새삼 선생의 시대를 앞서간 문제의식과 연구 성과, 그리고 민족에 대한 깊은 사랑을 확인할 수 있었다. 친일문제에 관한 선생의 연구 업적은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이 분야 연구에 독보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친일청산을 향한 선생의 외로운 개척자의 길은 이제 역사의 큰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어디 그뿐이랴! 2,30년 전만 해도 아무도 돌아보지 않던 사회사나 여성사에 대해서도 선생은 대중적 서술 형태를 빌어 기초를 닦아 놓았다. - 임종국선집을 출간하면서, 임헌영(민족문제연구소소장)
덧붙이는 글 | <여인열전>-여성, 세상을 열다(임종국선집7)-민족문제연구소/아세아 문화사/2006년 10월 30일/1만4000원

▲제1권:친일, 그 과거와 현재(1994)▲제2권:또 망국을 할 것인가(1995.2)▲제3권:한국인의 생활과 풍속(상)(1995.11)▲제4권:한국인의 생활과 풍속(하)(1995.11)▲제5권:여심이 회오리치면(상)(2006.1)▲제6권:여심이 회오리치면(하)(2006.1)▲제7권:여인열전-여성,세상을 열다(2006.10)▲제8권:빼앗긴 시절의 이야기(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