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의 기초적 요소가 어떤 계통에 속하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하게 증명되어 있지 않으나, 알타이어 계통설이 가장 유력하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오면서 국어의 계통에 대한 여러 가설()이 있었는데, 그 중에는 우랄알타이어족(), 일본어, 중국어, 아이누어, 드라비다제어(), 심지어 인도유럽어족에 국어를 결부시키려는 시도도 있었다. 전자는 우랄알타이어족이 우랄어족과 알타이어족으로 양분된 뒤에는 알타이 계통설로 발전하였다. 19세기의 우랄알타이어족설은 이들 언어 사이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몇 개의 뚜렷한 구조적 특징이 국어에도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그 공통 특징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모음조화(調)와 문법적 교착성()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이 구조적 특징 위에 세워진 우랄알타이어족의 가설이나 여기에 국어를 결부시키는 가설은 그 근거가 매우 빈약한 것이 드러났다. 즉, 구조상의 유사는 동계의 언어들 사이에서 발견되지만 그렇지 아니한 언어들 사이에서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조상 공통 특징의 일치는 국어가 알타이제어와의 친족 관계에 있음을 암시해 줄 따름이다. 친족 관계가 증명되려면 어휘나 문법형태의 비교에서 엄밀한 음운대응()의 규칙이 수립되어야 하는데, 현재 알타이제어의 비교에 있어서는 정밀한 음운대응의 규칙이 수립되어 있지만, 이들과 국어의 비교에서는 그처럼 정밀하게 되어 있지 않은 형편이다. 알타이제어와 국어의 비교가 이처럼 정밀하게 이루어지지 못한 이유는;

  1. 각 어군()의 고대 자료가 적고,
  2. 각 어군들 사이에 속하는 언어들 사이에 차이가 적으며,
  3. 많은 언어들이 아주 소멸해 버린 까닭이다. 특히 부여계() 제어의 완전 소멸은 국어의 알타이제어와의 비교를 벽에 부딪치게 한다.

imagesCA2E85DK.jpg이 부여계제어는 알타이제어, 특히 퉁구스제어와 가깝고, 또 한편으로는 한계()제어와 가까웠던 듯 하며 오늘의 국어는 고대 신라어()의 계통을 이은 것이므로 한계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중간 교량적인 부여계제어의 소멸로 말미암아 국어 속에 알타이적 요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사이에 정밀한 음운대응의 규칙을 수립하기 어렵게 만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므로 국어와 알타이제어가 친족관계에 있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지만 알타이조어()와 국어의 선조( ·)와의 관계는 아직 숙제로 남아 있다. 알타이조어에서 국어의 선조가 일찍 분리하여 나온 일파일 가능성도 있고, 또 이들이 자매 관계에 있어 하나의 공통 조어로 소급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국어의 선조는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것처럼 단일성이 있었던 것은 아닌 듯하다.

기원 전후만 해도 한반도와 만주에 걸친 넓은 지역에는 숙신계() ·부여계 ·한계()의 3대 어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우선 부여계제어에는 부여어 ·고구려어 ·옥저어() 및 동예어 등이 있었던 것 같다. 이는 《삼국지()》(289?) <위서동이전()>의 기록으로도 부여어 ·고구려어 ·옥저어 ·동예어가 한 어군을 이루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 어군은 고대 숙신의 언어와의 대립에서 명백히 파악된다. 또, <위서동이전>은 읍루()에 대하여 “고구려와 언어가 같지 않다()”고 하였는데, 읍루숙신의 후예로서 물길() ·말갈()에 그 계통이 이어지며, 《북사()》(659) <물길전()> 등에는 물길에 대하여 “고구려 북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언어가 (고구려와) 다르다()”고 한 것 등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부여계제어는 뒤에 고구려어에 의하여 대표되게 되었다. 부여어 ·옥저어 ·동예어 등은 아무 자료도 남기지 않고 소멸하여 버렸으나 고구려어만이 단편적인 기록을 남기고 있다. 한편, 한반도 남부에는 삼한()이 있었다. 진한() ·마한() ·변한()이 그것인데 이 삼한은 또 여러 부족으로 나누어져 있었던 듯하며, 이는 곧 언어적 분화()를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위서동이전>은 진한에 대하여 “ ”이라 하였는데 ‘’은 ‘’의 동음성()에 따른 작위()인 듯하다. 그리고 변한에 대해서는 “”라 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로 보면 진한과 변한의 언어는 서로 비슷하고, 마한의 언어는 이들과 서로 다른 것이 된다. 그러나 《후한서()》 <동이전>에서는 진한과 변한에 대하여 그 언어와 풍속이 서로 다르다고 기록하고 있어, 두 기술이 혼선을 보이고 있는데, 이에 대하여는 몇몇 예들에 의하여 실증되기도 하거니와 이 두 언어는 상당한 차이를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이 한국 민족사회는 뒤에 백제 ·가야 ·신라로 3분되었는데, 그 중 가야어는 신라어와 차이가 있었던 듯하며 오히려 고구려 지역에서 발견되는 요소가 더러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북방 부여계가 아니었던가 하는 의문도 있다. 부여계제어와 한계제어()의 상호관계를 살펴보면 부여계 언어 가운데 유일하게 현존 자료를 가진 고구려어는 한계제어와 단일하였던 것 같지는 않다. 지금까지 개연성 있는 입증으로는 분명한 알타이계 언어로서 퉁구스제어와 가까운 일면, 신라어 및 일본어와는 각별한 친족관계에 있었던 것 같고, 고구려어와 알타이제어(특히 퉁구스제어)의 관계는 신라어와 알타이제어의 그것보다 훨씬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고구려어가 알타이제어와 신라어의 사이에 있음을 암시한다. 한편, 신라어의 입장에서 보면 고구려어는 가장 가까운 친족 관계를 보여주는 언어인 것이다. 백제어에 대하여 《양서()》(629) <백제전()>에 “ ”이라 하였는데, 이는 백제 지배족()이 고구려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언어에 대한 기술로 생각된다.

피지배족은 한계()에 속하는 마한어()를 사용하였을 것이므로 지배족과 피지배족 사이의 언어는 달랐던 것으로 짐작된다. 오늘날 남아 있는 백제어의 자료는 신라어와 매우 가까웠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백제에서 지배족의 언어가 피지배족의 언어를 동화시키지는 못하고 어느 정도 그것에 영향을 주는 데 그쳤던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백제어는 마한어의 계속으로서 부여계 언어의 상층()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신라는 일찍이 서라벌을 중심으로 낙동강 동쪽을 지배하였고, 6세기에 가야제국()을 합병하여 고대국가로서의 기반을 굳혔거니와 이와 같은 신라의 성장 과정은 그 언어의 팽창 과정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이어 7세기 후반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 10세기 초까지 계속되는 동안 한반도에서 신라어 중심의 언어통일이 이루어졌다.

10세기 초에 고려의 새왕조가 개성()을 중심으로 세워지자 정치 ·문화의 중심이 경주()에서 개성으로 옮겨졌다. 개성 지방은 원래 고구려 땅으로서 통일신라의 서북 변방이었으므로 개성 주민들의 언어에는 어느 정도 고구려의 요소가 남아 있었을 것이나, 역시 전체적으로는 신라어의 한 방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고려어()는 결국 신라어를 근간으로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14세기 말 조선이 건국되자 개성으로부터 서울로 중심이 다시 옮겨졌으나 이것은 한국어 역사에 있어 별다른 변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오늘의 한국어는 직접적으로는 고려 초 개성에서 이루어진 고려 중앙어()에 소급되는 것이다.